2022년 인도네시아 공포영화 《이반나》는 시력을 되찾은 주인공이 목 없는 동상과 마주하면서 벌어지는 저주의 연쇄를 그립니다. 전통적 공포 연출, 역사적 배경, 처절한 복수의 서사가 어우러진 이 작품은 《셔터》를 연상케 하는 동남아 특유의 섬뜩함으로 관객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1. 오래된 요양원에 드리운 불길한 그림자
영화의 배경은 한적한 시골에 자리한 요양원. 주인공 안바르와 그의 여동생 티카는 이슬람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을 찾습니다. 첫째 안바르는 고도 근시로 인해 평소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최근 시력을 일부 회복한 뒤부터 보이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보기 시작합니다. 요양원은 겉보기엔 평화롭고 따뜻한 분위기지만, 영화는 초반부터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게 만들죠. 천둥 치는 밤, 혼자 있던 노인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는 장면은 이곳의 과거가 평탄치 않았음을 예고합니다. 요양원 옆의 낡은 폐건물에 들어간 남매는 기묘한 상자와 일기장, 그리고 LP판, 목이 없는 정체불명의 섬뜩한 동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동상이 바로 이 작품의 핵심 공포의 시발점입니다. LP판을 재생하자 요양원의 분위기는 갑작스레 활기를 띠지만, 곧 전기가 나가고 안바르의 시력은 순간적으로 돌아오며 끔찍한 환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유령의 출몰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원한이 시각적으로 스며드는 순간으로 그려져 극도의 불안을 자극하죠. 특히, 정체불명의 동상이 거실 한가운데 나타나는 장면은 압권입니다. 아무도 장난을 친 적이 없는데 동상이 스스로 움직인 흔적을 남기고, 가족들은 점점 더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죠. 이는 단순한 귀신 영화가 아닌, 기억과 저주, 역사적 비극이 결합된 복합적인 공포임을 암시합니다. 이 요양원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과거의 피와 분노가 봉인된 장소이며, 이를 건드리는 순간 공포의 문이 열리는 것이죠.
2. 이반나의 사연과 피로 새겨진 복수의 시작
주인공 남매는 LP판의 음악과 함께 과거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점점 더 깊숙이 끌려갑니다. 안바르는 시력이 돌아올 때마다 이반나의 과거를 ‘보게’ 되는데, 이반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계 인도네시아 여성으로, 일본군의 점령 속에서 인도네시아 민중들을 몰래 도우려다 배신을 당한 인물입니다. 그녀의 순수한 의도는 결국 같은 민족에게조차 침략자의 피라는 이유로 배척당했고, 일본군에 의해 머리는 우물에, 몸통은 동상으로 남겨지는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동상이 바로 주인공들이 발견한 그것이었죠. 이 끔찍한 죽음을 안바르는 환영처럼 보게 되고, 관객 역시 그 과거를 함께 체험하게 됩니다. 영화의 중후반부는 본격적으로 이반나의 저주가 폭발하는 구간입니다. 할머니의 끔찍한 죽음, 지하실에서 되살아나는 기괴한 형상들, 가족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장면은 전통적인 공포영화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인도네시아 특유의 정령신앙과 영적 세계관이 결합되어 더욱 이질적이고 두려운 느낌을 자아냅니다. 이반나는 단순한 유령이 아니라, 억울한 죽음이 낳은 집단적 원한의 화신입니다. 후반부, 그녀의 오빠가 동생의 시신을 ‘의식’에 따라 진흙으로 감싸며 기리는 장면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끔찍합니다. 여기서 관객은 이반나가 단순한 악령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억울한 죽음을 해명받지 못하고, 복수마저 강제로 매장당한 비극의 인물이며, 그 고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다시 돌아온 존재인 것이죠. 안바르가 그녀를 보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설정은, 피해자와 목격자의 교감을 상징하며, 공포를 넘어 감정적 울림까지 이끌어냅니다.
3. 공포의 종착지, 우물 속으로 떨어진 진실
마침내 남매는 이 모든 저주의 근원이 ‘이반나의 머리’가 버려진 우물임을 알게 됩니다. 이 저주를 끝내기 위해선 동상을 파괴하고 우물로 되돌려야 한다는 절박한 결론에 다다르죠. 가족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동상을 들고 우물로 향하고, 이 장면에서 영화는 전통 공포 연출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비, 천둥, 어둠, 고요 속의 음산한 음악—이 모든 요소가 절묘하게 배치되어 관객을 긴장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라이터를 가지러 간 사이, 남매는 이반나의 공격을 받고, 한 명씩 쓰러지며 이반나의 복수가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동상은 우물로 떨어지며 이반나의 육체는 진정한 안식을 얻은 듯하지만, 마지막 순간, 영화는 또 한 번 반전을 선사합니다. 안바르가 떠나려는 순간, 이반나의 기운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죠. 이반나의 저주는 과연 끝난 걸까요? 아니면 다시 누군가의 ‘눈’을 통해, 그 피의 기억이 부활하게 될까요? 영화는 이 질문을 남긴 채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며, 공포와 여운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이반나는 단순한 퇴마물이 아닌, 역사의 피로 얼룩진 땅에서 벌어지는 슬픈 복수극입니다. 과거의 아픔이 현재를 덮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이보다 더 섬뜩하게 전달할 순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인도네시아 역사와 문화가 섬세하게 녹아든 이 작품은, 단순한 공포를 넘어서 문화적 정체성과 집단적 트라우마의 발현으로도 읽힐 수 있어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오히려 점프스케어나 잔인한 연출에만 의존하지 않고, 음향과 심리, 어둠과 침묵으로 관객을 조이는 방식은 《셔터》나 《곡성》 같은 정통 아시아 공포영화의 계보를 잇는 수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