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종》은 《곡성》의 세계관을 잇는 공포영화로, 태국 이싼 지방의 토속신 바얀과 전설 속 요괴 피뻡의 충돌을 그린다. 영화에 등장한 끔찍한 저주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태국 민간 전설을 바탕으로 해석한 이 작품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들의 전쟁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다.
1. 착하게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나홍진 감독의 속임수
《랑종》을 처음 본 관객이라면, 자연스럽게 “이 사람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밍의 엄마는 전통신앙을 거부하고 교회를 다니며, 개고기를 팔았고, 외삼촌은 여색에 빠진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퇴마사 산티는 신을 도구로 삼아 돈벌이에 열중했고, 밍의 조부는 화재로 수많은 사람을 죽인 방적공장 참사를 일으킨 인물로 등장한다. 이 모든 인과관계가 마치 저주를 부르는 '죄의 연쇄'처럼 제시되지만, 나홍진 감독의 전작 《곡성》처럼 이러한 설명은 관객을 유인하는 ‘미끼’일 가능성이 크다. 《곡성》에서 감독은 “피해자가 왜 피해자가 되어야 하냐”는 질문에 대해, 그 어떤 죄나 원인이 없이도 고통은 찾아올 수 있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랑종》 역시 그 연장선에 있는 작품으로, 가문의 죄와 원한은 그럴듯한 해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신들 사이의 게임에 인간이 희생되는 설정을 은폐하는 가면에 불과하다. 관객은 영화가 깔아놓은 정보들을 조합해 이유를 찾아내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죄가 없어도 이 저주는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무차별적 재앙과 인과 부재의 테마는 《곡성》보다도 한층 더 염세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인간 존재의 무력함을 강조한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고 이해하려 하지만, 세상은 결코 그렇게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 《랑종》은 이러한 현실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보여주며, 스토리 전체에 걸쳐 관객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는다. 죄가 있으니 벌이 따랐다는 단순한 공식은 이 영화에서 무너지며, 진정한 공포는 **“왜 벌을 받는지도 모른 채 고통받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2. 피뻡이라는 이름의 악귀, 그리고 신을 죽이는 이야기
《랑종》의 진짜 공포는 눈앞에 보이는 피 따이홍 같은 원귀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작은 유령들일 뿐이고,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피뻡(Phi Pop)'이라는 태국 전통 설화 속 식인 귀신이 존재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피뻡은 내장을 좋아하는 요괴로, 정체가 들통날까봐 반려동물이나 가축을 잡아먹으며 위장을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도 복통이나 구토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고, 무당이었던 과거를 활용해 최면, 저주, 신통력을 자유롭게 쓰는 고위 악령이다. 특히 무서운 점은 이 피뻡이 가문을 따라 대를 이어 빙의한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밍은 유일한 여자 혈통이자, 수호신 바얀 신의 랑종이 될 운명을 지닌 존재다. 하지만 동시에, 피뻡이 숨어 들어 살던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기도 하다. 바얀 신이 그녀에게 내려오게 되면 피뻡은 쫓겨날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피뻡은 철저하게 계획을 세운다. 바얀 신이 밍에게 내리는 것을 막고, 오히려 밍을 영매로 완전히 오픈시켜 자리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피뻡은 밍에게 원혼들이 들락날락하는 연기를 하고, 어머니 노이를 속여 내림굿을 받게 만든다. 그 과정을 보면, 피뻡은 마치 곡성의 일본인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판을 짜고 모든 인물을 조종한다. 그리고 바얀 신과의 전투를 위해 방적공장에 저주 인형을 만들고, 수많은 원귀들을 모은다. 그 최종 목표는 바얀 신의 제거다. 결국 이 영화는 퇴마가 아닌 **"신을 죽이는 이야기"**이며,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조차 인간을 구하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른다. 여기서 피뻡은 단순한 귀신이 아닌, 정신적 존재들 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새로운 지배자로 떠오르게 된다.
3. 인간은 도구일 뿐, 모두는 소모되는 꼭두각시였다
《랑종》의 마지막 30분은 그야말로 혼돈의 연속이다. 퇴마사 산티와 님이 밍에게서 귀신들을 몰아내기 위해 의식을 진행하지만, 이미 밍은 피뻡의 숙주가 된 상태였다. 영화는 이 퇴마의식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참극을 통해 신과 악귀의 전쟁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보여준다. 퇴마의식이 시작되자 모든 원귀들이 단지에 봉인되지만, 피뻡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사람들의 무지를 틈타 퇴마의식을 어지럽힌다. 바얀 신은 인간의 수호신으로 나서지만, 사람을 구하기보다는 ‘제물을 바쳐 평화를 사려는’ 신에 가깝다. 엄마 노이에게 일시적으로 내려와 원귀들을 다스리는 듯하지만, 곧 피뻡에게 무력화되고 만다. 바얀 신조차 노이를 불태워 사라지게 되고, 마을은 완전히 피뻡의 손에 들어간다. 이때 카메라는 인간들이 아무런 이해도 하지 못한 채, 하나씩 도구로 희생당하는 모습을 담는다. 밍은 이미 악귀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고, 어머니는 이용당한 뒤 폐기처분된다. 외숙모는 복통에 시달리다 의식을 어지럽히는 존재가 되고, 퇴마사들도 결국 실패로 끝난다. 영화의 결말은 구원도 없고, 교훈도 없다. 오직 남는 것은 어떤 이유도 없이 발생한 공포와 상실감뿐이다. 이는 종교적 믿음, 과학적 시도, 전통적 의식 모두를 비웃는 듯한 연출로 관객에게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결론적으로 《랑종》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공포 영화의 공식을 완전히 뒤엎는다. 이 작품은 공포를 조종하는 악의 존재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력하게 허우적대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이 세상의 부조리함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영화다. 《곡성》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절망적인 세계관을 통해 나홍진 감독은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한 깊은 회의와 염세적 시선을 투영한다. 결국 《랑종》은 ‘신조차 죽을 수 있다’는 슬픈 진실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