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5. 4. 4. 07:38

공포 스릴러, 헤레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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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파 종교 선교사 두 명이 방문한 집은, 알고 보니 광기 어린 이단자의 밀실. A24 특유의 불편한 긴장감과 철학적 질문을 절묘하게 조합한 공포 스릴러 〈트랩하우스〉는 종교와 심리학, 이데올로기의 충돌을 지독하게 파고든다. 로맨틱 코미디의 상징이었던 휴 그랜트의 악역 연기는 경이로운 수준.

헤레틱

🕍 방문 선교가 맞닥뜨린 가장 불경한 '집'

영화는 어둑한 하늘과 번개가 예고하듯, 결코 평범하지 않은 방문으로 시작된다. 두 명의 여성 선교사—반스와 팩스턴—는 방문 전도라는 일상적인 임무를 위해 한적한 마을의 외딴 주택을 찾아간다. 그곳은 겉보기에는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지만, 첫 문을 연 순간부터 모든 것이 계획된 덫이라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들이 만난 집주인 미스터 리드는 겉으로는 조용하고 지적인 신사 같지만, 대화 속에서 점점 자신만의 종교관을 드러내며 교묘한 시험을 시작한다. 그는 종교의 경전을 따르기보다 그 안의 모순을 해부하고, 신에 대한 개념을 ‘환상’이라 부르며 상대방의 믿음을 흔들려 한다. 두 선교사는 처음엔 친절한 대화로 이어가지만, 곧 그 대화가 일방적이고, 강압적이며, 철저히 심리적 감금 상태를 유도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벽과 천장에 숨겨진 금속 구조는 통신을 차단하며, 문은 바깥과의 모든 연결을 봉쇄한다. ‘나가도 된다’는 리드의 말은 하나의 연극일 뿐, 이 집은 이미 그들만의 종교적 실험장이 되어버렸다. 선교사로서의 확신,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자율성이 극도로 흔들리는 이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 감금이 아니라 정체성과 신념 자체를 위협하는 영적 고문실로 기능한다.

🕳️ 문 뒤의 선택과 파괴된 믿음의 게임

리드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믿었던 신이 주지 못한 해답을 인간의 논리로 찾아내려는 자이자, 과거 신학에 집착했던 좌절한 구도자다. 그는 반스와 팩스턴을 상대로 일종의 '철학적 방탈출 게임'을 시작한다. 두 개의 문 앞에서 선택을 요구하며, 그것이 곧 그들의 믿음과 의지의 시험이라고 선언한다. 각각의 문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밝히지 않지만, 둘 중 하나는 '믿음', 다른 하나는 '불신'을 상징한다. 중요한 것은 정답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선택에 어떤 자기 해석을 부여하느냐다. 이 장면은 단순한 긴장 유발 장치가 아니라, 종교적 신념이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를 시사한다. 반스는 비교적 신중하지만 단단한 내면을 지녔고, 팩스턴은 점점 공포에 잠식되어 간다. 리드는 이 균열을 파고들며 '신은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가', '우리가 믿는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이때 휴 그랜트의 연기가 빛을 발한다. 그의 말투는 젠틀하지만, 속내는 조롱과 증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신은 동성애자를 만들고 그들을 증오하도록 우리를 세뇌시켰다"는 대사는, 영화 전체의 중심 테마인 신과 인간의 모순을 상징하는 폭탄 같은 대목이다. 여기서 이 영화는 단순한 밀실 스릴러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적 퍼즐로 확장된다. 리드가 꾸민 이 ‘시험’은 단순한 고문이 아니라, 신념의 파괴를 통한 개조 실험이다.

🎭 위선과 연민 사이의 악마, 휴 그랜트의 미친 존재감

〈트랩하우스〉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 중 하나는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다. 특히, 휴 그랜트는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 이미지와 완전히 결별하며 냉소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이단자로 분해, 완전히 새로운 얼굴을 선보인다. 그는 처음에는 정중하고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하지만, 대화가 깊어질수록 속내를 하나씩 드러내며 교묘한 심리 게임을 주도한다. 리드의 캐릭터는 사이코패스적인 폭력성이 아니라, 논리와 말의 기술로 상대방을 집어삼키는 ‘말의 괴물’에 가깝다. 그래서 더 무섭다. 클로이 이스트가 연기한 팩스턴은 후반부로 갈수록 불안과 공포를 극적으로 끌어올리며, 마치 실제 감금 상태에 처한 사람처럼 눈빛과 손끝의 떨림까지 표현해낸다. 그리고 소피 대처가 연기한 반스는 얌전하고 신중한 태도 속에서 끓는 저항과 슬픔을 압축해낸다. 두 사람의 대조적인 태도는 극의 긴장감을 증폭시키며, 종교적 가치관의 균열과 회복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마지막에는 리드조차 예상치 못한 반스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상황이 반전된다. 이 반전은 단순한 '도망 성공'이 아닌, 신념의 붕괴와 다시금 시작되는 자아 탐색의 서사로 이어진다. 영화는 종교와 이념이 ‘사람을 구원하는가’ 혹은 ‘파괴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남기며, 열린 결말로 끝을 맺는다. 마치 이 모든 실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관객 스스로 선택을 강요받는 느낌을 준다.

🔚 마무리

〈트랩하우스〉는 단순한 호러도, 스릴러도 아니다. 이 영화는 정체성, 신념, 인간의 선택과 자유의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담은 심리 미스터리다. 리드라는 괴물은 인간의 허무와 절망이 빚어낸 결과이며, 그 안에서 반스와 팩스턴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지켜낸다. 휴 그랜트의 역대급 악역 연기, 긴박한 카메라 워킹, 음산한 사운드 디자인, 종교와 철학이 어우러진 대사는 이 영화를 A24 특유의 걸작 반열에 올려놓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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