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5. 3. 28. 11:16

〈인생〉(1994) 장예모 감독의 걸작

반응형

장예모 감독의 걸작 〈인생〉은 국공내전부터 문화 대혁명까지 중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가족의 굴곡진 삶을 통해 인간의 생존과 희망을 그려냅니다. 금지작으로 묻힐 뻔했던 이 영화는 해외에서 극찬받으며 수많은 상을 휩쓸었고, 결국 중국 내에서도 정식 개봉되었습니다.

영화 인생

몰락과 시작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의 인생 전환점

부유한 지주 가문의 자손 구푸구이는 방탕한 도박으로 집안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며 인생의 첫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아내 자전은 절망한 채 아이를 데리고 집을 떠나고, 남겨진 구푸구이는 가족을 잃고 모든 재산을 날린 채 폐인처럼 살아갑니다. 그의 몰락은 단순한 개인의 실패가 아닌, 당시 사회에서 '지주'라는 신분이 의미하던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고, 이는 이후 혁명과 시대의 소용돌이에서 더욱 심각한 결과를 불러오게 됩니다. 그러던 중, 구푸구이는 옛 친구 룽얼의 도움으로 그림자극 도구를 빌려 생계를 꾸리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돈으로만 삶을 유지하던 그가, 처음으로 땀 흘려 일하고 정직하게 가족을 부양하며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죠. 바로 이 시점에서 아내 자전이 아기를 데리고 다시 돌아오면서, 두 사람은 다시 한번 희망을 안고 가정을 일궈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중국 대륙은 국공내전이라는 새로운 혼란에 빠지게 되고, 구푸구이는 군에 강제 징집되어 전쟁터로 내몰립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동료들과 함께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 부상자 방치라는 참혹한 현실을 겪습니다. 전쟁 중 동생을 찾으러 자진 입대한 한 병사는 구푸구이의 눈앞에서 적군의 총에 쓰러지고, 구푸구이는 손을 들고 항복하며 겨우 목숨을 부지합니다. 그림자극을 하던 이력 덕분에 그는 인민해방군을 위로하는 공연단으로 인정받아 목숨을 건지게 되죠.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해방군의 증명서를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달라진 고향, 그리고 새로운 체제 속의 현실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영화는 단순한 전쟁 체험기를 넘어, 구푸구이의 개인적 몰락과 사회적 격변을 교차시켜 보여주며 인생의 깊이를 더욱 농밀하게 쌓아가기 시작합니다.

혁명 속의 가족 모든 비극이 스며드는 일상

고향에 돌아온 구푸구이는 가족과 재회하지만, 그동안 가정에 남아 있던 자전은 가혹한 현실 속에서 온몸으로 가족을 지켜왔습니다. 구푸구이의 옛집은 이미 '반동분자'의 소굴로 낙인찍혀 철저히 부서졌고, 가족은 누추한 집에서 근근이 살아갑니다. 더욱이 그가 지주 출신임을 증명하는 군 증명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가족에게 또다른 위협으로 작용합니다. 혁명의 바람은 가족의 안위를 가리지 않고 파고들고 있었죠. 이후 벌어진 대학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은 이 가족에게 또 다른 파국을 가져옵니다. 딸 펑샤는 말 못 하는 장애를 지니고 있었지만, 가족을 위해 굳세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제철소에 동원되어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던 그녀는 결국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이 비극은 가족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습니다. 구푸구이는 딸을 구할 수 없었던 무력감에 절망하지만, 혁명의 파도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딸의 죽음을 계기로 생긴 인연은 새로운 희망이 되기도 합니다. 펑샤의 사망 이후, 그녀의 연인이었던 청년은 가족의 곁에 남아 구푸구이 부부를 도우며 살아갑니다. 그는 정직하고 성실한 공장 근로자로, 이후 문화 대혁명이 절정일 때조차 비교적 안전하게 가족을 지켜주는 인물이 됩니다. 하지만 또 한 번의 비극이 닥칩니다. 며느리의 출산을 위해 병원을 찾은 부부는 제대로 된 의사도 없이 홍위병 출신의 학생들이 수술을 맡고 있는 현장을 마주합니다. 결국 의사의 경험 부족으로 손자는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나고, 이 상처는 자전과 구푸구이의 가슴에 깊이 남게 됩니다.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조차 비극이 되는 이 시대의 잔혹함은, 이 가족에게 어떤 희망도 허락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삶은 계속된다 고통 속에도 피어나는 희망

모든 것을 잃은 후, 구푸구이와 자전은 초라한 삶을 이어갑니다. 혁명의 소용돌이가 지나가고,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온 뒤에도 그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소박한 행복과 따뜻한 연대의 힘을 보여줍니다.손자의 이름은 '만두'입니다. 그 이름엔 오래 살기를 바라는 소박한 기원이 담겨 있죠. 만두는 부모 없이 자란 아이지만, 구푸구이와 자전은 그를 마치 아들처럼 키우며 사랑을 아끼지 않습니다. 구푸구이는 그림자극 도구를 꺼내 아이에게 공연을 해주고, 자전은 병든 몸을 이끌고도 손자를 위해 밥을 지어줍니다. 가난하고 불편한 삶이지만, 서로를 위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오히려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습니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인생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희망을 찾을 수 있는지를 조용히 되묻습니다. 장예모 감독은 그림자극이라는 전통 예술을 통해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연속성을 연결하고, 평범한 이들이 겪는 아픔을 예술적 언어로 승화시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정치적 억압이나 사회적 이념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며, 그 안에서 잃지 않는 인간성, 가족의 사랑, 기억의 가치를 지켜나갑니다. 마지막 장면, 구푸구이가 손자에게 그림자극을 가르치며 "네가 하는 대로 흐르는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삶은 고통의 연속일 수 있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은 웃고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영화 〈인생〉은 그러한 진실을 너무도 아름답고도 담담하게, 그러나 잊히지 않게 전하고 있습니다.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