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휴양지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인신매매 조직의 덫. 휴가를 즐기러 온 금발 미녀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유혹, 납치, 감금, 탈출이라는 고전적이지만 여전히 강력한 서사 위에 펼쳐지는 이 영화는 우리가 ‘여행’이라는 단어에 기대하는 로망과 대비되며 공포감을 증폭시킨다. *이스케이프(Escape)*는 단순한 여성 납치 스릴러를 넘어, 인간의 본성과 악의 평범함에 대한 은근한 질문을 던진다. 진부함 속에서도 보는 재미가 살아 있는 이 영화, 장르 팬이라면 한 번쯤 즐기기에 딱 적당하다.
✈️ 1. 꿈같은 휴가가 지옥으로 바뀌는 순간
사막을 배경으로 한 첫 장면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불안감의 서막이다. 한 여성이 맨발로 도망치는 장면에서부터 관객은 이곳이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라는 걸 직감하게 된다. 이윽고 화면은 24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난 금발 여성 칼라와 그녀의 친구들이 등장한다. 햇빛 찬란한 리조트, 시원한 칵테일, 인스타에 올릴 만큼 예쁜 풍경. 모든 게 완벽했지만, 그들은 몰랐다. 누군가가 이미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미소를 ‘상품’으로 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조직의 정체는 금발 여성들만을 노리는 인신매매 집단. 그들은 정성스럽게(?) 작전을 짠다. 존잘남을 투입해 자연스레 접근시키는 방식부터, 실패 시엔 무력 납치라는 고전적인 수단까지. 이 대목에서 감독은 현실의 어두운 이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휴양지라는 단어 뒤에 숨은 수많은 실종과 범죄, 그리고 그 피해자들이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존재’인지를. 루시와 칼라가 이 함정에 빠지면서, 영화는 점점 본격적인 스릴러로 전환된다. 감금, 약물, 협박. 관객은 이제 그들의 탈출을 간절히 바라보게 된다.
🔥 2. 악의 일상성과 뜻밖의 연대
범죄 조직의 중심에는 대장 안드라스와 그 하수인 주드가 있다. 안드라스는 돈에 눈먼 자로 묘사되지만, 주드는 조금 다르다. 그는 병원비를 벌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악’의 일원이 되어버린 인물이다. 주드는 점차 죄책감에 시달리며, 여성들을 도와줄 작은 변수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 부분은 단순한 선악의 대결이 아니라, '악을 방조하거나 묵인하는 평범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드의 변화는 영화의 윤리적 축을 담당하며, 희망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반면, 여성들의 시점에서 보면 상황은 지옥도다. 감금된 상태에서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조차 모르는 혼란 속에서, 칼라는 주드의 숨겨진 의도를 단숨에 파악하고 이를 활용한다. 동시에 감옥에 갇힌 여성들 간에도 연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숨은 미덕 중 하나는 바로 여성 캐릭터들의 '능동성'이다. 구조되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행동하는 주체들로 묘사된다. 계획은 조금씩 어긋나기도 하고, 성공과 실패를 오가지만, 그들의 선택은 일관되게 능동적이며 현실적이다. 탈출의 순간이 다가올수록 영화의 긴장감은 최고조로 치닫고, 관객은 숨을 죽이고 그들의 결단을 응원하게 된다.
🎯 3. 도망, 복수, 그리고 끝나지 않은 여운
결국 칼라와 루시는 가까스로 사막을 빠져나오게 된다. 구조대가 도착하기 직전, 그녀들은 마지막 기지를 발휘해 범인들의 본거지를 무력화하고, 남은 피해자들을 구하기 위한 싸움에 다시 뛰어든다. 이 장면은 단순한 ‘도망’으로 끝나는 영화들과의 차별점이다. 자신이 겪은 공포를 넘어서, 또 다른 누군가의 지옥을 끝내기 위한 선택. 특히 칼라는 과거에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트라우마가 있어, 이번만큼은 절대 그 순간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한다. 그녀의 선택은 복수이자, 자기 구원이기도 하다. 조직의 보스 안드라스는 마지막까지 잔혹하고 집요하게 쫓아오지만, 결국 주드의 내부 협조와 여성들의 끈질긴 저항 앞에 무너지고 만다. 영화는 복수극의 클리셰를 따르지만, 그 안에 놓인 감정선이 진부함을 상쇄한다. 루시와 칼라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짧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영화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다. '그녀들은 왜 싸웠는가', '무엇을 지켜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 구조된 여성들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암시를 남긴다. 악은 사라지지 않았고, 누군가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같은 일을 겪고 있다는 듯이. 그래서 이 영화는 가볍게 끝나지 않는다. 불편한 여운과 묵직한 메시지를 남긴 채, 관객의 생각을 오래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