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헤르츠 고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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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래들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졌던 일본 사회의 그늘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아동학대, 영 케어러, 독부(毒父), 육아 포기, 정신질환, 그리고 불안정한 청년 세대까지.
이 작품은 단순한 가족 드라마를 넘어, 일본 현대사회의 구조적 붕괴를 정밀하게 포착한 사회파 수작이다.
이 영화가 남긴 울림은 결코 영화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마주하는 작품, 고래들의 세계로 초대한다.

52헤르츠 고래들 포스터

1. 눈물 대신 고래 소리 — 무너진 일상의 생존자들

작은 바닷가 마을 오이타. 해가 뜨기 전, 한 여성이 몸을 웅크리고 바닷바람을 맞고 있다.
이 여성, 키코는 한때 고급 맨션에 살았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돌봄 노동에 시달리는 일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안고'라는 여성과 함께 지내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다 말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감지된 슬픔으로 연대한다.

플래시백을 통해 드러나는 키코의 과거는 처참하다.
우롱차와 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돌보던 미성년 시절.
‘영 케어러’였던 그녀는 학교도,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도 없이 단절된 채 성장했다.
아버지로부터의 무언의 폭력, 어머니의 부재, 고립된 집안.
그녀의 삶은 ‘존재’가 아니라 ‘의무’로만 구성돼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안고. 그녀는 키코의 삶에 파문을 일으키며, 말없이 함께 울어주는 첫 번째 사람이 된다.

영화는 눈물 대신 ‘고래 소리’를 반복적으로 들려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설명할 수 없는 정서, 인간이 내지 못하는 울음을 고래의 소리에 빗댄 것이다.
이 모든 비극은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은 느낀다.
이 인물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참고, 눌러오고, 외쳐왔는지를.


2. 고래들 — ‘가족’이라는 이름의 잔혹한 굴레

고래들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혼자 울고 있는 존재들’이다.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에는 침묵으로 돌아서야 하는 인간 관계의 벽 앞에서 무너진다.
특히 영화는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오히려 폭력의 시작점이자 억압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집요하게 그려낸다.

키코는 어릴 적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것도 모자라, 아버지의 병수발을 강요받으며 청춘을 날려야 했다.
미하루는 자신을 괴롭히는 남성과 이별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이토는 친구도 직장도 없이 맥주로 하루를 견디는 무기력한 남성이다.
이들은 모두 '가족' 안에서 상처 입었고, '가족' 바깥에서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다.

영화는 일본 사회의 고질적인 세대 단절, 정서적 억압, 젠더 불균형 문제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심지어 서로를 위로하려고 다가간 두 인물 사이에도 ‘무의식적 지배’와 ‘감정적 착취’가 존재한다.
그 점에서 고래들은 결코 감상적인 치유 서사가 아니다.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다만 인물들이 서로의 상처를 마주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을 보여준다.


3. 절망 속 작은 숨결 — 지금, 일본이 마주한 거울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그 리얼함 때문이다.
단지 한 여성의 불행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여성의 삶을 통해 일본 사회 전반의 추락을 집약적으로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아동 학대, 육아 방기, 정신질환, 청년 빈곤, 독부(毒父) 문제 등
지금 일본 사회가 겪고 있는 병리적인 현실을 인물들의 삶 속에 섬세하게 녹여낸다.
이는 마치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의 경계를 오가는 듯한 사실감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준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LGBTQ 인클루시브 디렉터'의 감수 아래 제작되었고,
이를 통해 사회적 소수자의 시선이 섬세하게 반영되었다.
등장인물들의 정체성, 성적 경계, 젠더 감각은 모두 과장 없이 담담하게 표현되며
그 덕분에 영화의 현실감은 더 깊어진다.

감정은 과장되지 않고, 장면은 절제되어 있다.
하지만 잔잔한 이미지 속에 서린 고통은 관객의 가슴을 서서히 파고든다.
고래 소리처럼, 누구도 듣지 않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 절규는
바로 오늘날의 일본,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이야기다.


📌 고래들은 2023년 9월 4일 일본 개봉작이며, 마치다 소노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한국 정식 개봉이 이뤄질지는 미정이지만, 해외 영화제와 평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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