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본 공포 영화 중 가장 몰입하며 본 작품.
북유럽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비극이 섞인 미개봉 신작 호러 스릴러다.
‘사라진 아들, 그리고 소원을 이루는 동굴.’
처음엔 실종 사건으로 시작되지만, 결말에 다다르면 인간이 만들어낸 악마보다 더 무서운 건 ‘절망 속의 사랑’ 임을 깨닫게 된다. 잔잔한 음악조차 섬뜩하게 들리는 몰입형 공포영화의 진수.

사라진 사람들, 그리고 숲의 침묵
한적한 보호구역에서 발견된 버려진 차량 한 대.
관리인 스테판이 차량을 확인하던 밤, 그가 spm처럼 사라진다.
다음날, 또 다른 여인 아넬리카가 그 차량을 찾아온다.
그 차의 주인은 2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고 있는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두 해 동안 아들을 찾기 위해 숲을 헤맸다.
아들은 ‘보호구역 안쪽의 금지된 지역’에서 실종되었다.
아넬리카는 그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자원봉사 수색대에 합류한다.
그 과정에서 전남편 빅토르도 다시 마주하게 된다.
두 사람은 과거 사랑했던 사이였지만, 실종 이후 모든 게 변했다.
그날 이후 그들 모두의 인생은 멈춰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숲은 기이하게 움직인다.
불빛 없는 어둠 속에서 들리는 울음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부르는’ 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바로 마리아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악마의 동굴 — 소원을 이뤄주는 대가
수색대는 마리아가 남긴 지도와 흔적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오래된 기록 하나를 발견한다.
19세기 광부들이 죽어간 전설의 장소,
‘그루에 동굴(Gruet Cave)’ —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피의 재물’을 요구한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었다.
빅토르는 예전부터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지만, 그날 본 ‘아이의 환영’은 너무도 생생했다.
그는 마치 죄를 갚듯 아넬리카를 따라 동굴로 향한다.
그곳엔 이미 수많은 시체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라디오 신호는 끊기고, 발전기가 멋대로 켜지고 꺼지며
숲은 마치 ‘의식’을 시작한 듯 움직인다.
그들은 결국 ‘마리아의 비밀’을 알게 된다.
마리아는 아들을 되찾기 위해 이 동굴의 힘을 믿었다.
그리고 매달 한 사람씩을 제물로 바치며 태오를 불러내려 했던 것.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바로 사라진 스테판이었다.
욕망은 기도를 부패시킨다.
마리아는 점점 인간의 형체를 잃어가며
‘소원을 들어주는 자’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사랑의 끝은 공포였다 — 결말과 여운
동굴 깊은 곳에서 아넬리카는 마침내 마리아를 발견한다.
그녀의 앞에는, 오랫동안 찾던 아들의 시체가 앉아 있었다.
마리아는 이미 죽은 아들과 대화하며, 살아있는 이들을 제물로 삼으려 한다.
빅토르는 모든 걸 막으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피가 흐르고, 동굴이 흔들린다.
아넬리카는 간신히 살아남지만,
마리아는 아들을 끌어안은 채 사라진다.
그 순간, 빅토르의 손목에 새겨진 상처에서 불빛이 피어나고
마치 동굴이 그를 새로운 제물로 삼는 듯한 장면이 스쳐간다.
엔딩에서 구조대가 도착해 GPS 신호를 찾아내지만,
숲 한가운데 놓인 장비와 피 묻은 신발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카메라는 천천히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는 여전히 **‘소원을 이루려는 또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앉아 있다.
관람 후기 — 조용하지만 서늘한 악몽
이 영화는 거대한 괴물이나 점프스케어보다 ‘침묵과 공기’로 압박하는 공포다.
카메라는 끝없이 이어지는 숲과, 인물들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한다.
그 눈빛 하나하나에서 죄책감, 후회, 광기가 섞여 흐른다.
공포의 실체는 악마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인간의 집착이다.
마리아는 결국 아들을 찾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을 잃었다.
아넬리카는 살아남았지만, 눈 속 어딘가에서 아직도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북유럽 특유의 차가운 톤,
눈발처럼 흩날리는 감정,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만든 비극.
이 작품은 소리 없이 마음을 얼게 하는 영화였다.
잔혹하지만 아름답고,
공포이면서 동시에 슬픔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