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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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남편이 사라지고, 일상은 무너졌다.
그 속에서 중년 여성 요리코가 붙잡은 건 신흥 종교라는 ‘믿음’이었다.
영화 31일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흔들리는 일본 사회와 가족, 여성, 종교를 블랙 코미디로 예리하게 해부한 문제작이다.
한 여인의 일상을 파고든 사이비 종교의 민낯, 그리고 일본 사회의 집단적 불안을 섬세하고도 풍자적으로 담아낸 이 영화.
그 서늘하고도 유쾌한 파문 속으로 들어가 보자.

파문 포스터

1. 31일 후의 일상 — 무너진 평온, 파고드는 파문

영화는 아주 평범한 아침으로 시작된다. 남편의 코골이에 잠에서 깬 중년 여성 ‘요리코’. 그녀는 생수로 밥을 짓고, 병든 시아버지를 돌보며 바쁜 하루를 시작한다. 영화 속 시간은 동일본 대지진 발생 후 ‘31일’. 사회는 여전히 방사능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있고, 시민들은 언제든 닥칠 재난에 대비하며 불편한 일상을 감내하고 있다.

하지만 요리코에게 재난은 뉴스 속 일이 아니다. 갑자기 남편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집안은 조금씩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남편이 아끼던 꽃밭은 뽑혀 있고, 그 자리에 낯선 돌무더기가 생겨난다. 돌아온 남편은 전과 달리 어딘가 이상하다. 그의 표정엔 무표정과 무관심만이 깃들고, 집안을 수색하며 아내를 의심하는 태도까지 보인다. 요리코는 점점 압박을 느낀다.

이때 요리코가 의지하게 된 것이 바로 신흥 종교 ‘명수회’. 물을 마시거나 뿌리는 간단한 의식을 통해 정신적 위안을 주는 이 집단은, 실제 체험을 기반으로 신도들의 몰입을 유도한다. 그녀는 점점 종교에 빠져들고, 명수를 아끼며 남편 몰래 의식을 반복한다. 블랙 코미디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는 재난 이후 흔들리는 사회 속에서 개인이 기대게 되는 심리적 ‘대체 신념’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2. 믿음의 얼굴들 — 사이비 종교는 왜 중년 여성을 노리는가

요리코가 명수회에 몰입하게 된 배경에는 단순한 외로움이나 남편의 부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일상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실제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기존의 가치관에 균열을 겪었고, 급속도로 퍼지는 불안 속에서 신흥 종교들이 기세를 확장했다. 특히, 요리코처럼 중장년 여성들은 가정 내에서 억압되고 고립된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집단적 심리 불안과 맞물려 그들을 주요 표적층으로 만들었다.

명수회는 다소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의식으로 신도들을 끌어들인다. 물을 뿌리는 행위, 칙칙 세 번의 의식, 단순한 제단과 구호.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접근 가능하게’ 느껴지며, 요리코는 이 새로운 세계에 안정을 느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믿음은 그녀의 삶에 일종의 구조와 리듬을 제공한다. 무너진 일상의 균형을 ‘수상한 믿음’으로 지탱하는 셈이다.

남편이 돌아온 뒤에도 요리코의 신념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남편은 아내를 정신적으로 억압하고, 그녀의 소중한 제단과 명수를 멋대로 침범한다. 그녀가 붙잡고 있던 신앙은 단지 종교적 믿음이 아닌,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한 ‘마지막 감정선’이었던 것이다. 남편은 이 감정선을 무시한 채 자신이 있던 자리를 아무렇지 않게 되찾으려 하지만, 요리코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3. 불온한 평온 — 웃음 속에 숨겨진 일본 사회의 민낯

31일은 단순히 한 여인의 사이비 종교 빠짐을 다룬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현대 일본 사회의 내면을 고요하고도 뼈아프게 꿰뚫는다. ‘간병하는 노인’, ‘착취받는 중년 여성’,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 사라진 주체성’ 등 영화는 그 모든 구조적 문제를 요리코의 일상 속에 은근하게 심어 놓는다.

후반부에 이르러 아들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돌아오면서, 요리코는 또 다른 억압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억눌림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 새로운 질서 속에서 누군가를 억압하게 되는 아이러니는, 구조적 억압이 단지 개인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한 영화는 진지하거나 비극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과장된 사운드, 반복되는 몸짓, 기묘한 리듬감으로 무거운 현실을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로 포장하며, 웃음 뒤에 숨겨진 통렬함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믿음’은 삶을 지탱해주는 축이기도 하지만, 때론 현실을 회피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요리코는 진심으로 명수회를 믿는다기보다는, 스스로를 그렇게 믿게 만들며 버티고 있었다. 영화 속 세 번의 분사(칙칙칙)는 마치 일상을 유지하는 세 번의 심호흡처럼 반복된다.

31일은 일상이 얼마나 덧없고, 신념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할 수 있는지를 정밀하게 포착한다. 일본이라는 사회의 뿌리 깊은 억압 구조를, 웃음기 어린 껍질 안에 곰삭은 진실로 감싸 안은 영화.
그 속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종교도 남편도 아니다. 바로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일상’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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