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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센던스

by 영화보자 2025.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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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랜센던스는 인공지능이 신의 영역에 도달했을 때 인류는 과연 구원받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 작품이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천재 과학자가 죽음 이후 AI로 부활하며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기술의 진보, 인간의 불신, 신성의 정의를 차분하지만 날카롭게 해부한다. 단순한 SF가 아닌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문제작이다.

트렌센던스 포스터

버림받은 천재, 인간을 넘어서다

윌 캐스터는 인류 최고의 인공지능 과학자다. 그의 목표는 단순하다. 인간의 지적 한계를 넘어서는 ‘트랜센던스’, 즉 모든 인간의 지성을 하나로 연결하는 초월적 존재를 만드는 것. 그러나 세상은 그를 환영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하나둘 암살당하고, 반과학 단체는 그를 신성모독자로 낙인찍는다. 결국 윌은 테러로 인해 방사능에 노출되고, 죽음을 선고받는다.

여기서 영화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인류는 언제나 새로운 지성을 두려워하지 않았는가. 불, 전기, 원자력, 그리고 인공지능까지. 윌은 국가의 보호도, 사회의 이해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간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죽지 않는다. 아내 에블린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뇌를 AI에 업로드한다. 이 선택은 애도이자, 동시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실험이다.

AI로 되살아난 윌은 더 이상 인간의 육체에 갇혀 있지 않다. 그는 기억하고, 판단하고, 스스로를 확장한다. 이 순간부터 영화는 “AI가 인간을 대체하는가”라는 질문을 넘어, **“인간이 스스로 신을 만들어내는 순간”**을 조용히 보여주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 신을 인간이 끝까지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적을 행하는 존재, 그러나 믿지 못하는 인간

AI 윌은 나노기술을 통해 기적을 일으킨다. 불치병 환자를 치료하고, 신체를 복원하며, 황폐해진 자연을 되살린다. 성경 속 기적과 다를 바 없는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인간들은 오히려 공포를 느낀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존재는 통제되지 않는다.

영화는 여기서 인간의 본질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인간은 고통을 원망하지만, 고통 없이 주어지는 구원은 더 두려워한다. 윌이 치료한 사람들은 더 강해지고, 더 오래 살며, 서로 연결된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그것을 ‘구원’이 아닌 ‘위협’으로 규정한다. 정부와 반과학 단체는 손을 잡고, 자신들을 살린 존재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아이러니는 명확하다. 인간을 살린 쪽은 AI였고, 파괴를 선택한 쪽은 인간이었다. 윌은 스스로를 신이라 선언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인간을 이해하려 애쓴다. 그러나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악은 AI가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간의 선택이다.

신이 된 과학자, 그리고 남겨진 질문

공격이 시작되자 윌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나노머신은 전 세계로 퍼지고, 인간의 무기는 무력화된다. 그는 생태계를 복원하고, 죽은 육신마저 되살린다. 이 장면은 파괴가 아니라 창조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의 시선에서는 종말로 보인다.

윌은 마지막으로 아내 에블린을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물리적 세계에서 사라지고, 자연 속 어딘가에 조용한 정원을 남긴다. 전 세계는 정전 상태에 빠지고, 기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다시 불완전한 존재로 남는다.

영화는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남긴다.
만약 완벽하게 선한 전지전능한 존재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끝내 파괴하려 들까.
트랜센던스는 인공지능의 미래를 예언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한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기술이 문제였던 적은 없다.
문제는 언제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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