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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렌/2019

by 영화보자 202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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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있다. 매일 같은 집안일, 같은 대화, 같은 루틴. 완벽한 엄마이자 아내였던 그녀는 자신이 안드로이드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아니, 정말 그녀는 기계였을까? 폴란드 영화 『아레』는 정신병과 망상, 그리고 여성의 존재 가치를 ‘맞춤형 안드로이드’라는 상징을 통해 파고든다. “당신이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대체 가능한 존재일 뿐이었다면?” 영화는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얼마나 기계적인지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존재의 모호함과 상실의 공포를 가슴 아프게 보여준다.

포스터

🤖 1. "너는 엄마잖아" – 안드로이드에게 투영된 여성의 숙명

레나타, 일명 ‘렌’은 폴란드 외곽의 조용한 마을에서 남편 얀과 아들 카밀과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주부다. 하지만 이 평범함엔 비밀이 숨어 있다. 렌은 안드로이드다. 아니, 그녀는 그렇게 믿는다. 집안일을 완벽히 해내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존재해야 하는 그녀는 사실 ‘맞춤 제작된 가정용 아내’라고 설정돼 있다. 처음엔 정말 렌이 인공지능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점점 카밀이 그녀를 피하고, 남편조차 그녀를 이상하게 대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프로그램은 이상 신호를 감지한다. 렌은 혼란 속에서 ‘그날’의 기억을 잃는다.
남편은 그녀를 ‘가족치료센터’라는 곳으로 보낸다. 하지만 이곳은 단순 상담소가 아니라, 그녀의 상태를 점검하고 폐기를 결정하는 안드로이드 실험실 같은 장소였다. 렌은 그 안에서 ‘엘라’라는 여성 상담사를 만나며 점점 자신이 무엇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가게 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엘라는 “당신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며, 망상에 빠져 있다”고 주장한다. 이쯤 되면 관객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렌이 정말 기계일까? 아니면 정신병으로 인해 자신을 기계라고 믿는 인간일까? 감독은 그 경계를 일부러 흐리며, 관객을 정체성 혼란 속에 빠뜨린다. 결국 렌은, 사회가 원하는 완벽한 아내와 엄마 역할을 수행한 결과로 ‘기계적 인간’이 된 것 아닐까.

🧠 2. 기억을 잃은 엄마, 진실을 알고 있는 아이

이야기의 긴장감은 아들 카밀의 태도에서 정점을 찍는다. 렌은 아들의 사랑을 원하지만, 아이는 그녀를 점점 두려워하고 멀리한다. 왜일까? 렌이 자기를 해치려 한 걸까, 아니면 렌의 망상이 문제일까?
센터에서의 상담과 엘라의 유도 아래, 렌은 조금씩 기억의 조각을 맞춰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들에게 큰 소리를 지르며 위협을 가했고, 그 행동은 렌의 상실된 정신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신질환을 앓는 수많은 엄마들이 겪는 비극적인 현실과 맞닿아 있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감정이 통제되지 않는 극단적 상황에서 폭력적으로 변하는 모습.
문제는 렌이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고, 아이는 그걸 숨겼다는 것이다. 아들은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는 걸 알았기에, 비밀로 하고 조용히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결국 엄마를 병원에 가두게 만든다.
더 나아가 렌은 ‘자신이 안드로이드다’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사랑받을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낀다. 심지어 남편은 “새 모델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했던 그 말이, 그녀의 정신 속에서는 “나는 이제 쓸모 없는 구형 기계”라는 트라우마로 각인된다. 교체 가능한 존재,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가장 냉정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 3. 대체 가능한 존재, ‘엄마’라는 이름에 숨겨진 사회의 잔혹성

결국 렌은 모든 기억을 되찾고, 자신의 정신 상태를 받아들인다. 안드로이드는 아니지만, 자신의 병으로 인해 가족에게 해를 끼쳤다는 사실은 그녀를 무너뜨린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완치 판정’을 받아 다시 가족 곁으로 돌아가는 것.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너무도 잔인하다.
기다리던 남편과 아들이 찾아왔지만, 그들은 렌이 아닌 새로운 여성을 반기며 그녀를 지나쳐 간다. 그 장면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실제로 렌이 안드로이드였고, 가족이 새로운 버전으로 교체했다는 설정. 또 하나는 렌의 정신 속 망상이 만들어낸 장면이라는 것. 어떤 해석이든 그녀는 ‘가족에게 필요 없는 존재’라는 자각에 직면한다.
마지막 장면, 혼자 남겨진 렌이 미소를 짓는 환상 속에서 가족과 식탁에 둘러앉아 웃고 있는 장면은 너무도 슬프다. 그것이 현실이든 망상이든, 그녀가 바랐던 단 하나의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의 냉대, 기능적 역할로 환원된 가족 내 여성의 지위, 그리고 대체 가능한 인간의 존재 가치에 대해 날카롭게 질문한다. 그녀가 정말로 안드로이드였는가보다 중요한 질문은, “완벽하게 역할을 수행한 존재가 왜 버려져야 하는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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