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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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작은 말' 하나가 한 아이의 삶을 구할 수 있을까.
영화 벌새는 1994년 성수대교 붕괴라는 시대적 참사와 함께
그 시대를 살아가는 한 중학생 소녀의 일상, 아픔, 성장, 그리고 깨달음을 담담하게 그려낸 걸작이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소녀 ‘은희’는
결국 자신을 바라봐주는 단 한 사람을 통해
스스로를 껴안고 성장하는 법을 배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은희들’에게 보내는, 조용한 위로.

벌새 스틸 컷

1. 부서지는 일상 속, 조용히 흔들리는 아이

은희는 대치동의 중학생이다.
공부에 관심이 없는 은희는 항상 가족들 사이에서 ‘문제아’ 취급을 받고,
서울대만 바라보는 가족 속에서 존재감은 점점 줄어든다.
언니는 남자친구와 몰래 연애에 빠져 있고,
오빠는 은희를 때리는 일이 일상이며,
부모는 가게 운영에 지쳐 아이들의 정서에는 관심조차 없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명문대 진학을 향한 경쟁만 남은 공간에서
은희는 소외되고 무시당한다.
유일한 위안이었던 남자친구마저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걸 보고
삶 전체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간다.
귀 아래에 이상한 혹이 만져지기 시작했지만
그조차 부모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렇듯 영화는 특별한 사건 없이
은희의 일상 속에서 잔잔히 무너지고 있는 한 사람의 내면을 그린다.
크게 터지는 사건 없이,
은희가 얼마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지를
사소한 대화, 표정, 침묵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무심함은, 1994년의 서울,
성수대교 붕괴라는 실제 비극과 겹쳐지며
결국 ‘누군가의 무관심이 만든 사회의 균열’로 확장된다.


2. 작은 말 한마디가 삶을 바꾼다 — ‘영지 선생님’이라는 기적

영화 벌새의 중심엔 ‘관계’가 있다.
수많은 어른이 있지만,
정작 은희를 진심으로 바라봐 주는 어른은 단 한 명뿐이다.
바로 새로운 학원 선생님 ‘영지’다.

영지는 학생들에게 “자기를 싫어해본 적이 있냐”고 묻고,
은희에게는 “그 감정이 생기면 그냥 그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이 단순한 말이 은희에게는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통찰로 다가온다.

폭력적인 가정, 무관심한 부모, 배신한 친구,
혼란한 감정 속에서 방황하던 은희는
영지 선생님의 한 마디 한 마디 속에서 ‘존재로 인정받는 느낌’을 받는다.
선생님이 병원에 찾아와 “누구라도 널 때리면 가만있지 말라”고 말하는 장면,
은희가 아프다는 말에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며 흔들리는 순간.
이 모든 건 ‘말’이라는 작고 소중한 도구가 가진 힘을 보여준다.

은희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본다.
모든 사람이 등을 돌려도,
세상 어딘가에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믿기 시작한다.


3. 성장이라는 이름의 날갯짓 — ‘벌새’가 나는 법

은희는 수술을 받는다.
귀 옆의 혹을 제거하면서 남은 흉터는
그녀가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남긴 깊은 상처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 흉터는 곧 그녀의 ‘깃털’이 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벌새”라는 제목처럼,
몸집은 작지만 날개짓이 가장 빠른 생물을 통해
끊임없이 버티며 살아가는 소녀의 생존 방식을 은유한다.
영지 선생님은 떠났고,
은희는 여전히 혼란한 환경 속에 있지만
이제 그녀는 스스로를 이해하고 껴안을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장면,
영지 선생님을 기다리며 학원을 다시 찾는 은희는
이전의 은희가 아니다.
그녀는 누군가의 부재를 견디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법을 익히고 있다.

벌새는 단순한 성장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그 시절, 우리 모두가 은희였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고,
너무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던 목소리들이
이제는 조금 더 밝고, 선명해지길 바라는 기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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