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에서 깨어난 한 남자, 기억도 없고, 몸도 낯설고, 곁에는 의문의 시체. 『더 하이브』는 단순한 생존 공포가 아니다. 신체와 정신을 잠식해버리는 검은 바이러스, 그리고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 의식… 이 미지의 감염은 육체뿐 아니라 인간성까지 갉아먹는다.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 데이비드 야로브스키는 강렬한 플래시 컷과 초현실적 이미지로,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스릴러와 바디 호러로 풀어냈다. 신체 강탈의 공포,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유일한 구원의 열쇠가 될 수 있을까?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반가운 B급 수작이다.
🧠 1. 기억을 잃은 한 남자,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깨어난 주인공 ‘애덤’은 낯선 방, 피투성이의 손, 그리고 전혀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정체와 마주하게 된다. 방 안엔 시체가 하나, 외부에선 뭔가 괴상한 존재가 인기척을 낸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 그의 주머니에 있던 사진 한 장과 신분증이 유일한 단서다. 사진 속 여자 ‘케이티’, 캠프에서 알게 된 인연, 그리고 기억의 파편이 흐릿하게 맴돈다.
애덤은 기억을 잃기 전, 청소년 캠프에서 선생으로 일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케이티와 첫눈에 반한 관계였다. 하지만 단순한 사랑 이야기는 곧 무시무시한 바이러스의 존재로 바뀐다. 케이티의 친구 제스가 의문의 검은 액체에 감염되며 시체처럼 죽고, 다시 깨어난다. 단순한 좀비가 아닌, 자신이 ‘제스’가 아닌 ‘우리’라고 말하는 존재가 되어 나타난 것.
이 영화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기억 공유 바이러스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전개된다. 감염된 사람은 기존의 의식을 잃고, 하나의 집단적 자아(Hive Mind)로 통합된다. 애덤은 이들과 접촉하며 과거의 기억을 파편적으로 복원하고, 자신이 이 사태의 중심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서사는 마치 **‘메멘토 + 인베이젼 오브 더 바디 스내처’**를 연상시킨다. 기억 상실 상태에서 진실을 추적해가는 구성은 관객에게도 퍼즐을 맞추듯 정보를 제공하며 몰입을 유도한다.
🧬 2. 감염의 방식은 기억을 나눈다 — ‘사랑’마저도 바이러스일 수 있다면
검은 액체의 정체는 단순한 신체 감염 바이러스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공유하는 일종의 네트워크형 생명체, 즉 ‘하이브(Hive)’다. 감염자는 신체를 유지한 채 타인의 의식을 받아들이고, 결국은 자아를 잃고 집단에 흡수된다. 그 과정에서 감염된 자는 희생된 사람의 기억, 감정, 심지어 사랑까지 떠안게 된다.
가장 섬뜩한 장면은 ‘제스’가 깨어나 “나는 제스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다”고 말할 때다. 이는 단순히 육체를 빼앗는 공포를 넘어 자신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지는 실존적 공포를 건드린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클라크 역시 정상적인 사고를 유지하다가 점차 무너져 간다.
그런 가운데 유일한 희망은 ‘사랑’이다. 애덤은 케이티와 나눴던 진심 어린 감정, 그리고 소중한 기억들을 통해 감염된 의식 속에서도 자아를 되찾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결국, 애덤은 케이티가 바이러스에 완전히 잠식되기 전, 그녀를 죽임으로써 바이러스를 제거하고, 심폐소생술로 되살리는 선택을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 감염자 네트워크에서조차 강력한 개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무기였던 셈이다.
바이러스에 의해 기억이 덧씌워진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과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저항하는지를 그린 이 영화는, 단순한 호러가 아닌 존재론적 질문을 품은 SF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다.
🧨 3.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건 인간의 실험 – 그리고 모호한 결말
영화의 후반부에서 밝혀지는 이 모든 사건의 근원은 **‘베이커 박사’의 실험’**이었다. 그는 ‘케일라 현상’이라 불리는 기억 공유 현상을 연구하던 과학자로, 극단적 실험을 통해 기억을 주입하고, 여러 인간의 정신을 네트워크처럼 연결하려 했다. 그 연구는 정부의 지원으로 확장되었고, 결국 통제할 수 없는 ‘검은 바이러스’를 만들어낸다.
감염된 자는 자신의 존재를 잃고, 타인의 기억을 떠안은 괴물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든 인간성은 파괴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참사 뒤에는 **‘기억을 연결해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순진한 과학자의 의도가 있었다는 점이 또 하나의 비극이다.
결국 애덤은 살아남지만, 케이티는 기억을 잃은 상태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 세계는 이미 ‘하이브 바이러스’에 의해 잠식되었으며, 애덤은 케이티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을 다짐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결말은 열려 있다. 감염된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아를 지키고 있는 한 남자와 기억을 잃은 연인. 둘은 과연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세계를 되돌릴 방법이 존재하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