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하는 영국 최고의 흉가 ‘본리 목사관’을 모티브로 한 영화 더 베니싱.
전쟁의 그림자 속, 한 목사 가족이 이사 온 고딕 저택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들과
숨겨진 과거의 진실, 그리고 주교의 충격적인 계략까지—
이 작품은 단순한 퇴마물이나 유령 이야기를 넘어서
전쟁, 종교, 여성의 수치심과 구원이라는 깊은 주제를 엮어낸 하우스 호러다.
하지만 그 복잡한 구조만큼이나 아쉬운 점도 많았던 이 영화.
공포와 혼란 사이, 그 경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
1. 저택에 깃든 죽음 — 교회와 악령, 그리고 숨겨진 과거
전쟁의 불안감이 드리운 시기, 목사 라이너스와 그의 아내 마리안, 딸 에디는
주교의 명령에 따라 영국 시골의 교회 저택으로 이사한다.
겉보기엔 평화롭고 고요한 이 공간은 이내 이상한 소리를 내고,
거울 뒤에서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기분을 안긴다.
라이너스는 전임 목사가 사망했다는 사실에도 무관심하게 설교에만 몰두하며
주술사의 경고조차 가볍게 흘려보낸다.
반면 마리안은 거울 속, 지하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로부터 다가오는 ‘무언가’를
점점 더 뚜렷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딸 에디의 행동은 낯설게 변하고, 가정부는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공격당한다.
하지만 라이너스는 그런 아내를 오히려 의심하고 몰아세운다.
영화는 전형적인 하우스 호러의 구성을 따르며,
‘집’이라는 공간에 깃든 과거의 죄와 억압된 감정이
현재에 어떻게 되살아나는지를 중심으로 서사를 끌고 간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거울'이라는 상징이다.
거울은 단순한 반사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통로가 되며
인물들의 내면을 시각화하는 공포 장치로 기능한다.
2. 수치심과 죄의식, 그 틈을 파고든 악의 존재
영화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감정은 바로 ‘수치심’이다.
마리안은 과거 혼자 아이를 낳았던 상처를 숨긴 채 살아왔고,
그 기억은 여전히 그녀를 괴롭힌다.
이 감정은 단순한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아니라
악령에게 침투당할 수 있는 ‘틈’으로 작용하며
결국 그 틈이 그녀와 딸을 모두 위협하게 된다.
주술사는 바로 이 지점을 지적하며,
마리안에게 “수치심이 너를 약하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마리안은 의식을 통해 고문당해 죽은 또 다른 여인의 기억,
즉 중세 수도회에서 억압당한 여성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그녀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고,
비로소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난다.
이 의식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공포를 넘어선 ‘정화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공포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부정해온 기억과 감정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심리적 공포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지를 더 밀도 있게 전달했더라면
단순한 악령 퇴치 영화 이상의 무게감을 가졌을 텐데,
중반까지의 불균형한 전개와 설정의 산만함이 그 깊이를 방해한다.
3. 전쟁과 종교, 그리고 이용당한 믿음 — 열린 결말의 가능성
영화의 후반부는 주술사와 마리안, 라이너스가 함께
의식을 통해 딸 에디를 구하고,
유령이 된 아이와 여인을 위해 장례를 치르는
종결적 구조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 끝에서 밝혀지는 반전 —
주교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고,
악령의 힘을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에 제공하려 했다는
‘충격적 계략’이 드러난다.
이것은 단순한 하우스 호러가
종교 권력과 전쟁의 공모라는 거대한 담론으로 확장되는 지점이다.
교회, 악령, 고문당한 여성, 죄와 구원 —
모든 것이 결국은 거대한 역사적 비극과 맞물린다.
하지만 이 결말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던져지는 ‘에필로그’처럼 느껴져,
서사의 핵심에서 살짝 비껴나 있다.
좀 더 치밀하게 이 음모가 중반부부터 짜여졌다면
더 몰입감 있는 구조로 완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베니싱은
자극적인 점프 스케어나 고어 없이
심리적인 긴장감과 무거운 테마를 끝까지 유지한 점에서
전형적인 공포 영화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