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 Entangled,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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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을 겪은 딸이 출산한 소중한 아기를, 실수로 죽이게 된 할머니. 이 사건은 한 가족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어놓는다. 영화 『현기증』은 가족 간의 사랑과 용서, 죄책감의 늪에 빠진 인간의 이기심을 깊이 있게 조명한 심리 드라마다.

현기증

1. 평범했던 어느 가족에게 찾아온 비극

이야기는 어느 평범한 가족의 일상에서 시작된다. 첫째 딸 ‘양희’는 과거 유산의 아픔을 딛고 첫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으며, 둘째 딸 ‘꽃잎’은 수능을 앞둔 사춘기 소녀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엄마인 ‘순임’은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심해지는 건망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큰 병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노화로 생각되던 상태였다. 가족은 저마다 소소한 문제와 걱정을 안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안정적이고 평온했다.

하지만 이 평범함은 오래 가지 못한다. 양희가 건강한 아기 ‘하늘이’를 출산하고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던 어느 날 밤, 비극이 벌어진다. 양희는 육아로 인한 피로로 소파에 쓰러져 잠들고, 순임은 그런 딸을 위해 이불을 덮어준다. 그러고는 손자 하늘이를 깨끗이 씻기기 위해 화장실로 데려간다. 그런데 잠시 후, 불이 꺼진 화장실, 바닥에 놓인 슬리퍼, 그리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 순임의 모습은 끔찍한 사건을 암시한다.

하늘이는 그날, 순임의 품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평생을 기다려 얻은 손자이자, 유산 후 겨우 품에 안긴 아이를 잃은 양희는 말할 수 없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고, 이 사건은 단숨에 가족 전체를 파괴시킨다. 순임은 죄책감에 무너지고, 양희는 더 이상 엄마를 용서할 수 없으며, 둘째 딸 꽃잎은 학교폭력이라는 또 다른 고통에 방치된다. 평범했던 가족은 하루아침에 이해와 사랑이 아닌, 오해와 침묵, 분노와 단절로 이어지는 전쟁터가 되어버린다.

이 영화가 주목하는 건 단순한 사고의 결과가 아니다. 영화는 그 이후 가족이 어떻게 ‘부서지는가’를 집요하게 관찰한다. 누구도 완전한 악인도 선인도 아닌 가운데, 모든 인물이 점차 감정의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은 관객에게 묵직한 충격을 안긴다.

2.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병: 침묵 속에 갇힌 사람들

사고 이후 가장 큰 변화를 겪는 인물은 순임이다. 자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더 나아가 자신의 실수로 손자를 죽였다는 참담한 현실은 그녀의 정신을 파괴하기에 충분했다. 순임은 스스로 치매라고 믿으며 현실을 도피하려 한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단순한 ‘노망’이 아닌, 자기 방어적 합리화이자 심리적 붕괴의 증거다. 그렇게 그녀는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무덤 속에 자신을 가둔다.

한편, 딸 양희 역시 복잡한 감정 속에 갇힌다. 자식을 잃은 슬픔과 동시에, 그 원인이 자신의 엄마라는 사실은 그녀를 미치게 만든다.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가족이기에 더욱 괴롭다. 영화는 이런 이중적인 감정을 정확히 포착한다. 양희는 엄마와 대화를 시도하려 하지만, 감정이 앞서고 말은 뒤엉킨다. 그녀는 “엄마니까 용서해야 하는데, 엄마이기 때문에 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 복잡한 내면을 보여준다.

둘째 딸 꽃잎의 상황도 비참하다. 가족 모두가 사고의 여파로 서로를 돌보지 못하는 사이, 그녀는 학교폭력에 시달리고 있었고, 점점 외톨이가 되어간다. 부모도, 언니도, 누구도 그녀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영화는 그녀가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하는 장면을 통해, 이 사건이 가져온 여파가 단지 한 명의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각자에게 주어진 고통은 서로를 밀어내고,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더 큰 외로움과 절망을 낳는다.

3. 용서란 가능한가, 이기심의 그림자 아래서

『현기증』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족 간의 용서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순임은 딸에게 다가가 용서를 구하려 하지만, 딸의 입장에선 이미 늦었다. 사건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용서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침묵으로 일관한 순임의 행동은 오히려 그 죄책감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는 이 관계를 단순한 피해자-가해자의 구도로 보지 않는다. 후반부 순임은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딸 꽃잎이 자신에게 거울을 선물했던 이유가 밝혀진다. 거울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만드는 장치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난 건, 순임이 품고 있었던 진짜 감정—죄책감으로 위장한 이기심이었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가 결국 얼마나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철저히 냉정해질 수 있는지를 꼬집는다. 순임은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고 믿으며 심리적 면죄부를 얻으려 하지만, 영화는 묻는다. 정말 치매였던가? 아니면 그녀가 만든 환상이었던가?

엔딩에 이르러, 이 가족의 상처는 결국 회복되지 못한다. 관객은 누구 하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누구 하나 철저히 미워할 수도 없다. 이 영화는 그런 모호함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다.

『현기증』은 비극적인 사건 하나가 가족의 심리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인간이 용서받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를 속이려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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